그리고 화면에서 저를 반겨준 것은 동화풍의 그림이었습니다. 작고 귀여운 요정이 등장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색감은 아동용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었습니다.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그림체를 보고는 대충은 뭔가 베베 꼬인 작품이라고 직감하긴 했지만...
생닭이 지성을 얻어서 공장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정신 나간 듯한 동화같은 에피소드가 계속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자 술자는 '나'인데 자신이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식량난을 겪거나 섬에 고립되고, 복잡한 폐허에서 길을 잃고, 만화 속에 갇히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작품에서는 '페어리'라는 단위를 등장시키긴 하지만, 이것만 믿기에는 뭔가 위험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차분하게 전개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중심축은 인류 쇠퇴기에 대한 서술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비판들은 지겨울 정도로 듣는 내용들입니다. 여러 명작의 교훈은 결국 지루하기 딱 좋은 내용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 표현과 사건 전개의 방식인데 작품은 동화적인 배경과 캐릭터, 그리고 요정을 선택하고는 주인공인 '나'의 미묘하게 냉소적인 독특한 시각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전개인데도 독특한 서술 덕분에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인류의 멸망 원인입니다. 하지만 몇가지 힌트로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위급한 상황에서 '나'의 이야기 전개는 상당히 부조리합니다. 심지어 인류가 쇠퇴하는 상황인데도 사람들은 담담히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의 설명에 의하면 갑작스럽게 쇠퇴한 것이 아닌 오랜 기간을 두고 쇠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식량 부족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했고, 과도한 자원 소모로 폐쇄 생태계가 붕괴하고 결국은 문명이 붕괴하는 에피소드(아마도 이스터섬의 이야기가 모티브였던 것 같습니다. 참조 : http://mirror.enha.kr/wiki/%EC%9D%B4%EC%8A%A4%ED%84%B0%20%EC%84%AC )가 있긴 했지만 작품속의 문명이 자원 부족으로 쇠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전개 방식 때문에 과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지만, 오히려 작품 속 쇠퇴기의 인류가 현대 인류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 모뉴먼트 계획에 대해서 작품 속의 인물들이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과거의 기술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도 부족함이 없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급격한 재해나 전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보기 힘든 점이, 과거의 대부분의 건축물에서 폭발이나 화재, 진동, 수몰 같은 재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파괴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구가 감소하고 관리가 힘들어지면서 붕괴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 인구 감소는 기술 쇠퇴와 생산력 감소로 이어지는 듯한 인상입니다. 어떤 원인으로 인구가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원인이 사라지면 다시 증가세에 들어서야 정상입니다. (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306/h2003061018385822180.htm ) 하지만, 여전히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구 감소의 원인이 작품 속 시점에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자의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면,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풍요가 인류 쇠퇴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출산률은 감소하고, 평균 연령은 증가한다고 합니다. 참조 : http://mirror.enha.kr/wiki/%EC%B6%9C%EC%82%B0%EC%9C%A8 ) 그리고 전쟁의 원인은 물자의 부족인데, 전쟁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인류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과 만화속의 세상의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차이점은 요정의 존재입니다. 인류의 쇠퇴 원인이 요정의 등장 원인과 겹치거나, 요정 자체가 인류의 쇠퇴 원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1화에서와 비슷한 수단으로 인류의 삶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글에서 중요한 부분은 작품의 주제를 담아내는 독특한 서술방식과 이에 따른 재미인데, 다른 이야기가 오히려 더 길어졌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은 오랜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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